지금은 산남(한라산 남쪽, 서귀포 인근)에서 제주시로 가는 도로와 교통편이 편하고 자주 왕래를 하는 편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서울 강남보다 더 교통 체증이 심할 때도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고향(남원 태흥)에서 제주시로 다니러 가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만큼 제주 산남 사람들은 제주시 가는 것이 지금 외국에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쉽게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가끔 몇 km가 안 되는 동네지만 그 동네 고유의 언어도 존재할 정도로 자신의 터를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우리 할머니, 어머니 세대들은 지금도 산남에서 제주시로의 행차에는 자신들만의 마음의 준비와 외모 준비를 하시곤 한다.
며칠 전 고향 집에 다녀왔다. 집 우연내(텃밭)에 어머니는 아진배기콩을 심으셨다. 이 콩을 따고 나서 5월에는 장콩을 심는다. 그리고 6, 7월에는 그 장콩의 잎을 따서 된장에 쌈을 싸먹는다.
올해 어머니는 85세이다. 8, 9년 전에 물질을 완전히 관두신 이후에는 지금의 우연내는 어머니의 작은 세계이다.
건강이 안 좋아서, 해녀일 끝내고 한동안은 물질을 못 하는 것에 많이 화가 나 “아이구 이제는 다 되었다.” 하면서 자신을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연내에 돌아가면서 콩, 고추, 가지, 호박, 지슬(감자), 감저(고구마), 마농(마늘) 등을 심으신다. 그리고는 자신의 정성과 시간을 함께한다.
지금의 우연내에 페트병을 막대기에 거꾸로 꽂아 놓은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저거 무사 저추룩 행 나두어 수꽈?”(저기 왜 저렇게 해서 나 두셨는지요?)
그러자 “아이고 콩 심어 나두 난 꿩비애기인가 뭔가 호끄멍헌 생이가 왕 콩 다 파먹어 부난게(콩을 심고 나니 꿩 새끼인지 작은 새가 와서 콩을 다 파먹어 버리니까) 맨날 비애기 다울지도 못하고 경허난”(매일 작은 새를 쫓아내지도 못하고 그래서) 하신다.
나는 놀라움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지혜를 발휘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삶의 지혜는 자신의 정성과 집중만 있으면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구나!’
속으로 우리 어머니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했다. 비록 연로해 가는 몸으로 조금씩 거동이 불편해지고 있지만, 정신은 아직까지 정정하시구나 생각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뿌듯함과 안도감 등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가 고마워졌다.
어머니는 딸이 호주에 사는데 가고 싶어 하신다. 항상 아버지하고 싸우시고는, “느네 아방 미썽볼랑 죽어지키여 나 호주에 강 살당 안오키여.”(너희 아버지 미워서 죽겠다 호주에 가서 살다 돌아오지 않겠다.) 하셨다. 이 말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하시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10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아서 항상 말리곤 했다. 올해 여동생이 호주에서 집을 짓고 이사를 준비 중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겠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어머니가 집과 우연내를 벗어나서 이틀만 지나면 “자기가 살던 고망(구멍)이 최고주게.” 하시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실 것을.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건강하신 때에 다녀올 수 있으면 좋겠다.
갑자기 30여 년 전 일이 생각난다.
사촌이 대구에서 결혼해 친척분들하고 대구 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는 내가 보던 신문을 거꾸로 보고 계셨다.
“어머니! 무사 신문을 경 거꾸로 봠수꽈?”(왜 신문을 그렇게 뒤집어서 보고 있나요?)
“모수와부난”(무서워서)
어머니와 호주 여행이 기대된다.
어떤 차림과 외모로 비행기에 오르실지, 그리고 외국에서 어떤 에피소드를 던져 주실지….
우연내에 지금 바람이 분다.
그리고 페트병이 소로소로 소리를 내면서 흔들거린다.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과 함께 어머니, 삶, 정서, 흔적등 우리들의 이야기가 5월초 어머니의 루이비통이란 제목의 책으로 함께합니다. 많은 관심가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밖으로 빛나는 보석은 아니지만 우리 가슴 한켠에 배롱배롱하게 빛나는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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